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독서가's Room

4.<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>_우밍이_202201003

Alma 「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」

우밍이  / 허유영 옮김

 

어린아이의 천진한 얼굴이란 원래

우리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기 위해

인생이 꾸며놓은 사기극이다.

- <육교 위의 마술사> 중 -

 


 

"이 소흑인이 어제 그 소흑인이랑 달라 보이냐?"

나는 고개를 저으며 우물쭈물 말했다.

"똑같은 거 같아요, 아니에요? 그 소흑인 안 죽었죠? 그렇죠?"

마술사가 두 방향을 동시에 쳐다보며 말했다.

"나도 몰라. 꼬맹아, 세상에는 우리가 영영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어.

사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."

"왜요?"

내 물음에 마술사가 생각에 잠겼다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.

"평생 네 기억 속에 남는 일이 네 눈으로 본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."

-  <육교 위의 마술사> 중 -

 


 

내 꿈은 니카노르 파라의 시를 새겨 넣은 열쇠로만 열 수 있는 자물쇠를 만드는 것이다.

예를 들면 "내 영혼에 어울리는 육체를 찾고 싶다" 같은 구절들 말이다.

그것도 특정 글씨체로 새겨진 것이어야만 한다. 

나는 그 열쇠가 작은 새처럼 문 옆 고리에 걸려 있는 상상을 한다.

우리는 누군가와 헤어질 때마다 

열쇠를 돌려받거나 자물쇠를 바꾼다.

가끔 나는 열쇠를 어딘가에 빠뜨려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.

- <돌사자는 그 일들을 기억할까?> 중 -

 


 

엄마가 여동생의 죽음 앞에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모르지만

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목격한 나는 

인생의 박탈감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.

....(중략)...

그건

누군가가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가져가버려

그 후에는 윙윙 울리는 전구를 끄고 난 뒤의 어둠과

뒤따라 찾아오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과 같다.

- <돌사자는 그 일들을 기억할까?> 중 - 

 


 

참, 당신에게 줄 열쇠가 하나 있다.

구슬을 꿴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액세서리로 사용해도 좋고 열쇠고리로 써도 좋다.

이 열쇠에 맞는 자물쇠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.

없다.

어디에도 없다.

내 취미는 열쇠를 만드는 것이지 자물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.

당신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열쇠로 열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.

하지만 열쇠가 만들어지면

언젠가는 그것으로 열 수 있는 무언가를 꼭 만나게 될 것이라고

나는 믿는다.

- <돌사자는 그 일들을 기억할까?> 중 -

 


"쌍둥이는 한 영혼이 둘로 나누어진 거야. 

내가 너희 둘을 다시 한 사람으로 합쳐줄 수가 있어.

내가 셋까지 세면 너는 오른쪽으로 돌고 넌 왼쪽으로 돌아서 서로 등을 맞대고 눈을 감아라."

....(중략)...

눈을 떴는데 형이 보이지 않는 거야.

태어나서 그렇게 무섭고 당황했던 적이 없었어.

아주 잘 알고 있고, 내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지다니. 

육교 위에 나와 마술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.

육교 아래에서는 여전히 차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햇빛은 희미했지.

1초.

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 나의 놀람이 울음으로 바뀌었어.

내 목소리가 도시를 넘어 머나먼 숲까지 들리게 할 기세로 악을 쓰고 울었지.

- <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> 중 -

 


그 후에도 우리는 얼마 정도 더 사귀었고 가끔 섹스도 했어.

나는 애무를 하며 그녀의 은밀한 곳을 핥았지.

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이 차갑더라.

버려진 도시나 봉쇄된 길처럼.

우린 석달 뒤에 헤어졌어.

- <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> 중 -

 


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편지가 아니라

종교의 경전이나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.

만약 그게 거울이라면 그 거울 속엔

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열여덟 살의 아름다운 죄수가 있었을 것이다.

- <조니 리버스> 중 -

 


우리가 특별하다 여기는 일들 중에

사실은 어리석은 일들이 종종 있다.

하지만 그 나이 때 나는

그 어리석은 일이 한 여자의 감정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.

언젠가부터 상가의 처마와 전깃줄에서 참새들이 자취를 감춘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.

- <조니 리버스> 중 -

 


나는 군에 입대했을 때 첫날 받은 만터우를 먹지 않고 보관해뒀다.

그때 나는 수집벽이 있었다. 만터우는 금세 딱딱해졌고,

나는 첫 휴가를 나올 때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유리문이 있는 책장 안에 넣어두었다.

....(중략)...

만터우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지만,

색이 누렇게 변하는 것 말고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.

나는 점점 익숙해져서 만터우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.

그러다가 10년 전 어느 날 아침에 양치질을 하고 책장 앞에 섰다가

문득 무언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.

몇 초 뒤 그곳에 있어야 할 만터우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.

알고보니 곰팡이균이 만터우를 남김없이 먹어치운 것이었다.

- <금붕어> 중 -

 


나의 따분하고 어수선한 인생에

마침내 얼음 조각처럼 녹아도 물의 형태로 존재할

무언가가 남게 된 셈이다.

- <금붕어> 중 -

 


우표에 침을 발라보았니?

예전에는 나도 우표 뒤를 혀로 핥아서 침을 발랐어.

찝찔하고 미끄덩한 촉감이

꼭 혀가 하고 싶은 말을 우표 뒤에 붙이는 것 같았지.

- <새> 중 -

 

 


어떤 소설에서 "모든 사랑에는 시작점이 있다"라고 했지.

그 시작점이 성냥의 앞머리처럼 작고 연약하다고 해도 말이야.

날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것과 날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것.

이 둘의 가장 큰 차이가 뭘까?

내 생각에는 말이지,

나를 사랑하는 여자에게 키스할 때는

여자의 아랫배가 홀쭉해지며 소리가 난다는 거야.

- <탕씨 아저씨의 양복점> 중 -

 


모든 이야기가 기억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.

기억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나 그리움의 대상과 비슷하지만

이야기는 그렇지 않다.

이야기는 점토처럼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겨난다.

이야기는 다 듣고나면 또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야 하고,

화자가 그걸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.

하지만 기억은 보존 방식에만 신경쓰면 그만일 뿐

그걸 누구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.

기억이 망각의 부분과 합쳐질 때 비로소 이야기가 되고 얘기할 가치가 생긴다.

- <자귀나무 아래의 마술사> 중 -